
4장 글 쓰듯 살 수 있다면
한 끗 차이 :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곧 새로운 이야기다
세상에 새로운 주제가 어디 있겠나. 주제가 새롭지 않다면 관점이라도 새로워야 한다. 그러나 관점도 새로울 수 없다면, 그 주제를 푸는 방식이나 표현법이라도 나만의 것이 되어야 한다.
한 끗 차이는 디테일에서 나오기도 한다. 디테일하게 쓴다는 건 글 안의 어떤 지점에서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한 끗을 넣는 걸 의미한다.
문장의 디테일은 결국 '비유의 문제'로 향하기도 한다. 읽는 이의 머릿속에 시각적인 그림을 그려 넣는 것. 관념적이고 두루뭉술한 표현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비유로 바꿔놓는 일이 곧 디테일을 살리는 작업이다.
어쩌면 가장 정확한 표현 방식은 비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평상시에 무언가를 예리하고 섬세하게 설명해내기 위해, 자신이 표현하려는 말과 글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우리는 종종 비유를 사용한다.
뾰족한 글쓰기 : 악플에 대처하는 방법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례하게 비난하는 투의 댓글이 달리면 어김없이 화가 난다. 그러다 문득, 세상 사람들이 내 글에 전부 동의하여 엄지를 치켜세워줄 거라고 기대했던건 아닌가 돌아보게 됐다.
악플을 다는 사람 대부분이 나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은 게 아니란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이가 내 글의 제목만 보거나 본문의 앞부분만 대충 읽고서 엉뚱한 댓글을 썼다. 그런 댓글에까지 마음을 쓰는 건 절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기사 내용의 맥락을 잘 파악하고 반박하는 근거를 들어 쓴 댓글이 자격 있는 비판이듯, 마찬가지로 나란 사람의 피상적인 면뿐 아니라 내 삶의 서사와 배경까지 헤아리고 건네는 말만이 자격 있는 조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르게 생긴 인간이고, 모두 다른 생각과 취향, 가치관, 유머 코드를 갖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려 애쓰곤 했다. 그러면 무례한 댓글이든 훈훈한 댓글이든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대로 인정하거나 잘 무시할 수 있었다. 무시할 것은 무시하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게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무시와 받아들임은 결국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길에서나 부드럽게 구를 수 있는 동그라미 같은 글을 줄곧 써왔다. 누가 내 글을 읽고 상처받는게 너무 무서워서 최대한 문체도 내용도 둥글게 만든 다음 어떤 이의 마음 밭에서나 마찰 없이 구를 수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글이 대체로 바른말, 뻔한 말이 돼버렸다.
영감이란 대개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다. 이 자극들은 대부분 뾰족하다. 그 영감들은 뾰족하기 때문에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독자에게 착하게 보이는 글만 쓰는건 작가로서 직무유기가 아닐까. 무해하기보단 유해한 글을 쓰고 싶다. 독성 있는 글을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치명적인 글을 쓰고 싶다.
접힌 부채를 펴는 일 : 상상력을 더해 쓰기
영화를 보고 리뷰 기사를 쓸 때 그 작품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밖으로 드러내는 글을 쓴다. 이런 글쓰기는 작품 속에 함축된 것을 설명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안으로 모으고 압축된 것을 밖으로 펼치고 확장하는 모습이 마치 부채 펴기와 같다.
잘 만든 드라마, 잘 만든 노래는 압축된 세계를 담고 있다. 그것을 사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개인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함축된 걸 설명으로 풀고 해석하는 글을 쓰다 보면 작은 개체나 부분에서 전체를 상상하는 능력이 발달한다. 어떨 땐 내가 너무 과잉해석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이란, 만든 사람의 손을 떠나면 그걸 향유하는 도갖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나의 권리이기도 하다.
이 세상이라는 접힌 부채를 당신 손으로 펼칠 때 비로소 부채에 감추어진 진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펜촉으로 내가 나를 찌르기도 했지만 : 영혼을 지키는 글쓰기
펜은 칼보다 강하다. 이 말을 실감한 건 공교롭게도 그 칼로 나 자신을 찔렀을 때다.
회의후 하나의 기사를 써야했는데 어떤 가사의 내용을 비난하는 내용을 다뤄야 했다. 그 가사를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비난을 해야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리뷰 말미에 짧게 해당 내용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기사를 써서 편집팀에 넘겼다. 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기자님, 이 노랫말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댓글이 무례하지 않은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닌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자기 영혼을 훼손하는 짓인지 비로소 알았다.
차를 우려내듯 쓴다 : 글쓰기의 진심
가끔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쓴 편지를 보면 형식은커녕 문법도 엉망이고 글자도 괴발개발인데, 어떤 미사여구의 수려한 편지보다 진심이 느껴진다. 진정성이 담긴 글에는 매혹된다. 반대로 형식미 있게 잘 썼지만 진심이 안 느껴지는 글에는 정이 가지 않는다.
진심을 담는게 글쓰기의 사명이라고 할 때, 글쓰기가 다도와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차를 우려내듯, 진심을 우려내어 글을 쓸 수 있다면. 차를 마시는 행위는 '과정'이 주는 선물이어서 차를 우려내고 음미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정돈된다. 그것은 명상과 다름없다. 글쓰기라는 행위 또한 그 자체에 의미가 깃든 일이다. 홀로 책상에 가만히 앉아 노트북을 열고 고요하게 내면의 것들을 끄집어내어 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은 스스로 나은 길을 찾는다.
그렇다, 글쓰기는 수행과도 같다. 글이 막혀서 안 써질 때 우린 인내심을 발휘하고, 그 인내심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고뇌하는 인간에서 연민하는 인간으로 : 나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글쓰기는 자아성찰 과정이다. 어떤 주제로 쓰든 무언가를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한 인간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수시로 자각하고 반성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격려할 때 그는 더욱 참인간에 가까워질 것이다.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진다는 것, 그것은 고뇌의 결과다.
더 자주, 더 많이 쓴다는 건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고뇌하면 할수록 나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글쓰기 초반에는 오로지 나를 위해 글을 썼다. 하지만 요즘은 타인을 위해 쓰는 일의 값짐을 알아가고 있다. 현재 내가 쓰는 글들은 나 자신을 위함과 타인을 위함,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씀으로써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을 향한 연민을 키워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공동체는 친절해질 것이다. 덜 추악해질 것이다. 미움은 적고 사랑은 많은 곳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이 고뇌하기를, 더 많이 쓰고 생각하기를, 나와 나를 둘러싼 이 세상을 위하여.
정리
다행히 하나의 장이 넘어가면서 주제가 겹치지 않을까, 잘못되게 파악하는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그렇진 않은것 같습니다.
이번장은 매력적인 글쓰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한 끗 차이 라는말이 있는데 깊게 생각하지않고 의미를 받아들이면 한 끗이 정말 작은 차이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말도 된다는 것에 깊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같은것을 바라보더라도 사람마다 관점의 차이가 생기며, 같은 것을 표현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말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디테일 하게 표현할 수록 글에 나 자신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뾰족한 글쓰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받을 수 있지만 자신만의 글을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글을 제공해줄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나와 다른사람들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그 말은 남에게 비난 받는 글을 썻다는건 내 자신의 글을 썻다는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글쓰기에 진심이 담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글에 형식만 있고 진심이 담기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도 글자를 읽게 됩니다.
글에 진심을 담기위해 나 자신에 집중하고 의미없는것들을 절제하면서 글을 만드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매력적인 글을 작성한다는 것은 내 자신을 더 디테일하게 드러내야 하는 과정인것같습니다. 많은 유행어나 인터넷의 유명한 말들을 따라 쓰는걸 볼때면 왠지 글이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작성자의 진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