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내 안이 텅 빈 것 같아서
오답노트에는 나만의 답이 있다 : 삶이라는 문제를 풀려면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것은 해설을 보고 맞춘 정답들이 아니라 오답들 입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해설지를 보고 정답을 이해한 척 살아갈 수도 있지만 오답이더라도 본인 스스로 경험을 해야 나 자신의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을 먼저 살다간 현자들, 철학자들, 인문학자들의 말들은 쉽게 들춰본 해설지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 보다는 틀리더라도 내가 직접 경험해봐야만 한다는 것을 오답노트가 두꺼워지고 나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문학작품들 속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풀어낸 오답들 때문에 고뇌하게 되고, 이런 고뇌들이 자신들만의것이기 때문에 근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삶속의 주인공이 되기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고 고뇌하는 과정들을 겪어야 나다운 인생을 사는게 될 것 입니다.
마음을 빼앗긴 순간을 수집하자 :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본 영화나 책 그리고 이런 매채들 말고도 오늘 날씨, 교통들에 관해 이야기 하곤 합니다. 이런 리뷰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내가 이런 메세지에 공명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관해 쓰게되면 필연적으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만약 어떤것에 관해 쓰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에 동의하고 반대하는지 알 수 없었을것입니다.
글쓰기 강의에서 간혹 '무엇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만약 쓰고싶은게 마땅히 없다면 아무 대상에 대한 리뷰를 써보라고 권합니다. 모든 사람은 같은 것을 봐도 다른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같은 대상을 리뷰해도 오직 당신만의 고유한 생각이나 감정이 글을 통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원 없이 씽씽이 타던 시절이 있나요 : 잃어버린 적성을 찾아서
어릴 때 만큼 좋고 싫음이 명확하던 시절은 없습니다. 선입견에 물들지 않은 채, 무엇을 하면 장차 나의 스펙에 도움이 될지를 따지지도 않은 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에 내가 순수하게 좋아했던 것, 상자 안에 모았던 것을 글로 적으면 지금 내 삶에 막힌 부분을 뚫을 힌트를 얻게 됩니다.
백지 위를 내달리기 : 나다운 것과 나답지 않은 것?
예전엔 글쓰기에 앞서 개요를 먼저 작성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과정을 생략하게 됐다. 개요짜기를 안하는데 글이 무리없이 써지는 이유가 뭘까? 답은 단순했다. 나는 개요를 짜지 않고 살기 때문에 글도 그렇게 쓰는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곧 내가 쓰는 방식이다. 삶과 씀은 서로 닮았다. 자기 성격대로 쓰게 돼 있다.
글쓰기는 곧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어서, 생각을 계획하지 않는 것과 같이 글쓰기도 그렇게 써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본질이 아닌까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생각이 우리를 끌고 갈 때가 더 많다.
부캐의 시대 : 성격의 꼬리표 떼기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으면 나다워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난 이기적이고, 내향적이고, 감성적이지만 때때론 이타적이고, 외향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이게 자책할 일인가를 곰곰이 따지게 되었다.
그래서 글로 써보기로 했다. 나답지 않은 성향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적고 어떤상황에서 그런 행동들이 나왔는지를.
그 결과 이런 성향들은 당시에 상대방의 성향과 태도, 당시의 분위기에 따라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성격을 끄집어 낸 결과였단 걸 알 수 있었다. 관계라는 건 두 사람 이상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에 상대방에 따라 내 성격이 변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변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유연한 태도였다.
이렇게 내가 거짓이라고 생각했던것들이 '수많은 내 모습들 중 하나의 나'였던 것이다.
'부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도 위와 같은 생각을 반영한 시대적 상황처럼 보인다. 부캐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이런 현상은 개인이 상황에 맞게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멀티 페르소나'의 트렌드가 부상한 것에 바탕하고 있다.
부캐의 삶을 통해 참자아를 찾을 수 있단 걸 깨닫는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떤 부캐는 본캐보다 더 주인공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부캐를 드러냄으로써 창살 안에 가둬둔 자신을 그 틀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면 이 사실이 비로소 보일 것이다. 나답게 행동함으로써 내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게 나다운 행동이라는 사실 말이다.
달리, 반, 피카소 : 문체라는 언어의 색
피카소의 그림은 피카소답기 때문에 가치 있다. 그림에 화풍이 있다면 글에는 문체가 있다. '나만의 문체'를 갖는 일은 내 오랜 염원이다. 문장의 속도감이나 수사법 등에서 확연한 독자성을 보이는 경우에 그 사람은 자신만의 문체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문체라는 건 단지 내용물을 담는 그릇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형식은 단지 껍질이 아니라, 안의 내용물을 표현하는 하나의 고유한 방식이다. 어떤 식으로 사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가치관을 알 수 있다. 글도 삶처럼, 특정 형식을 취하는 것만으로 이미 메시지까지도 드러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장르를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왕도는 없는 일이다.
내 머릿속의 트럼본 : 트라우마와 살기
살면서 상처받거나 갈등하거나 이별했을 때, '괜찮아, 걱정하지마'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트라우마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스스로에 의해 표현될 때 트라우마는 비로소 녹아내린다.
트라우마는 나를 괴롭히지만 때때론 나에게 좋은 영감이 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길 포기하고 그냥 합리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털어버리기까지의 시간도 내 삶이기에 그것까지도 괜찮은 날들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1990년 이후 몇몇 심리학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의 반대편에 놓인 '외상 후 성장'이라는 새로운 가설을 선보였다. 어쩔수 없는 두려움을 극복해내고 나면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차원으로 들어선다는, 즉 내적으로 성장한다는 이론이었다. 이렇듯 트라우마를 통해 내적성장을 이룰수 있게된다.
다만 내적성장을 이루기 위해 고통을 예술로 승화해줄 자기만의 도구가 필요하고 나에겐 그 도구가 글이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글로 씀으로써 껴안아주자. 트라우마는 내 안의 골칫덩이지만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줄 인생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도 괜찮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더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해준다면 트라우마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정리
작가는 자기 자신과 글쓰기를 동일시 하고있기 때문에 글쓰기 관련 책임에도 불구하고 글의 내용이 자아성찰과 관련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것, 나 자신을 인정하는것이 나다운 것이며, 이것이 나 다운 글쓰기를 할 수 있게된다고 전달하고 있습니다.
글쓰기가 힘들 경우 주변의 아무것에 대해서 리뷰를 해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리뷰를 하면 사실은 해당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표현하는게 아닌 내 자신이 사물을 해석하는 방법이 글로써 표현되기 때문에 결국엔 리뷰라는 행위도 나 자신을 표현하게됨을 알려줍니다.
이런 관점은 저 스스로에게도 참 놀라운 부분으로 다가왔는데, 실제로 다른것을 표현하는게 나 자신을 표현하는것이 된다는점이 새로운 깨닮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